[스크랩] 조선중기(약 1550~1700)의 회화
■ 조선중기(약 1550~1700)의 회화 ■
조선 중기(약 1550년~1700년)는 임진왜란, 정유재란,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 대란이 잇달아 생기고 사색붕당이 계속되어 정치적으로도 매우 불안한 시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색있는 한국적 화풍이 뚜렷하게 형성되었다.
이 시대에는
첫째, 조선 초기 강희안 등에 의해 수용되기 시작한 절파계 화풍이 김시, 이경윤, 김명국 등에 의해 크게 유행하였고
둘째 이정근, 이홍효, 이징 등에 의해 조선 초기의 안견파 학풍이 추종되고 있었으며
셋째 이암, 김식, 조속 등에 의해 영모나 화조화 부분에 애틋한 서정적 세계의 한국화가 발전하게 되었고
넷째 묵죽, 묵매, 묵포도 등에서도 이정, 어몽룡, 황집중 등의 대가들이 꽃을 피웠다.
이 밖에도 중국 남종 문인화가 전래되어 소극적으로나마 수용되기 시작했다.
정치적으로 혼란했던 조선 중기에 이처럼 회화가 발전될 수 있었던 까닭은 조선 초기의 전통이 강하게 남아 전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믿어진다. 사실 중기의 화가들은 안견파 화풍을 비롯한 조선 초기의 회화 전통에 집착하는 경향이 두드러졌고, 새로운 화풍을 받아들이면서도 전통의 토대 위에 수용하였다. 또한 이 시대의 화가들은 한가지 화풍에만 집착하기보다는 두서너 가지의 화풍을 수용하여 그리는 경향을 현저하게 나타냈다. 이 밖에도 이 시대에는 사대부와 화원들 중에 화가 집안을 형성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기도 했다.
중기의 회화에서 또한 크게 주목되는 것은 조선 시대적인 정취를 짙게 풍겨주는 영모나 화조화가 발달했던 사실이다. 안경을 쓴 듯 귀여운 눈을 지닌 이암의 「화조묘구도(花鳥猫狗圖)」, 달무리진 눈매와 퉁퉁한 몸매를 보여주는 퇴촌 김식의 「우도(牛圖)」, 애잔한 느낌을 자아내는 창강 조속과 매창 조지운 부자의 수묵화 조화 등은 그대표적인 예들이다. 탄은 이정의 묵죽도, 설곡 어몽룡의 월매도, 영곡 황집중의 묵포도도 등에서도 한국화 현상이 현저히 엿보이고 있다.
김식은 그의 증조부인 김제에 이어 가법에 따라 물소 그림을 즐겨 그렸다. 그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우도(牛圖)」는 간일하고 애잔한 산수를 배경으로 어미소와 젖을 빠는 송아지의 모습을 보여준다. 언덕과 나무의 표현에는 이 시대에 풍미한 절파 화풍이 두드러져 보인다. 음영법으로 표현된 몸, 검은 눈, ×자형의 콧등, 곡선진 뿔, 점선으로 정의된 등 등이 돋보이는 소의 모습은 확실히 김식을 중심으로 한 이 시대 서정적인 동물화의 특징을 잘 드러낸다.
이 시대 화조화로서 가장 잘 알려져 있는 작품은 조속의 「노수서작도(老樹棲鵲圖)」이다. 화면을 메우듯이 펼쳐진 나뭇가지들과 나뭇잎들, 쌍쌍이 마주앉은 까치들, 삼각형의 잎새들, 채색을 배제하고 수묵으로만 이루어진 묘사법 등이 돋보이며 이 시대 화조화의 경향을 대변해 준다. 조속의 화조화는 그의 아들인 조지운과 그 밖의 화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이 시대 사군자 중에서 대나무와 매화가 특히 활발하게 제작되었다. 대나무 화가로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인물은 이정이다.
이정은 어려서부터 천재화가로 수문이 났으며, 묵필의 힘이 수준 높게 느껴지고 있는 이들 그림에서 우리는 간략한 먹선으로 단번에 공간을 구성하는 뛰어난 안목과 그림의 내부에 감추어진 강렬하면서도 원숙한 조형의 힘을 감지할 수 있다.
왕실출신인 그는 임진왜란 때에 왜병의 칼에 오른팔을 상하여 그 후에는 왼손으로 그림을 그린 것으로 전해지는데, 「묵죽도(墨竹圖)」에서 보듯이 절파풍의 바위 주변에 자생하는 대나무의 모습을 즐겨 그렸다. 균형잡힌 포치, 농묵으로 묘사된 근경의 대나무와 그 뒷편의 담묵으로 흐리게 표현된 대나무의 대조, 강경한 줄기와 길고 날카로운 잎의 조화, 힘에 넘치는 필력 등이 돋보인 대가로서의 이정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대나무 못지 않게 매화가 자주 그려졌는데 주로 백매화를 수묵으로만 그리는 풍조가 유행하였다. 특히 어몽룡이 유명했는데, 그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월매도(月梅圖)」에서 보듯이 늙은 가지는 꺾어진 모습으로, 새 가지는 하늘을 향하여 치솟는 모양으로 묘사되어 대조를 보인다. 이 밖에 줄기에 가해진 농묵의 점법도 매화가지의 형태를 마무리 지어주고 생기를 불러 일으킨다. 매화꽃의 형태는 구체적이기 보다는 대강의 모습만을 담묵으로 대범하게 표현하였다. 이러한 매화그림은 이 시대에 폭넓게 유행하였고 후기에도 계승되었으나 후기에는 주로 홍매를 붉은색을 써서 그리는 경향으로 바뀌어 갔다.
조선 중기의 회화에서 또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먹으로 그리는 포도그림의 유행이다. 포도의 화가로서 유명한 사람은 황집중이다. 그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묵포도도(墨葡萄圖)」는 이 시대 포도그림의 특색을 잘 보여준다. 비록 본래의 훨씬 컸던 작품의 잔편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지만 위로부터 아래편으로 빗겨져 뻗어 내린 가지의 대각선 포치, 음영이 적절히 구사된 둥근 포도알의 입체감, 벌레먹은 넙적한 잎, 꼬불꼬불한 덩굴의 말림새, 윤곽선 없는 줄기, 거침없는 필법과 농담의 변화가 두드러진 묵법 등이 주목할 만하다. 황집중의 이와 같은 화풍은 포도그림의 모체가 되었다.
조선 중기의 화가들 중에서 제일 먼저 주목되는 인물은 말할 것도 없이 김제이다. 그는 산수, 인물, 우마 등 다방면의 주제를 그렸고 화풍도 다양했으나 특히 안견파 화풍과 절파계 화풍을 즐겨 그렸다.
안견파 계통의 작품으로는 「한림제설도(寒林霽雪圖)」가 대표적이다. 이 그림은 그가 만 60세 되던 때인 1584년 가을에 안사확이라는 사람을 위해 그린 작품이다. 이 작품의 구도나 공간 처리 등은 안견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사시팔경도」 중의 「초동」에 토대를 두고 횡으로 좀 더 확산시킨 듯한 느낌을 준다. 왼쪽 종반부에 치우친 편파구도, 수면을 따라 펼쳐지는 확 트인 공간 등은 두 작품 사이의 상호 관계를 말해준다. 그러나 김제의 작품에서는 근경과 원경 사이에 산 허리나 다리를 배치하여 일종의 삼단구도를 형성하고 있고, 또 산의 기울어진 형태가 절파계의 영향을 반영하고있는 것이 차이다.
김제 화풍의 또 다른 현상은 「동자견려도(童子牽驢圖)」에 잘 드러나 있다. 나귀의 고삐를 잡아 당겨서 다리를 건너게 하려는 귀여운 동자와 건너지 않으려는 고집스러운 나귀 사이의 안간힘을 표현한 이 작품은 절파계 화풍을 수용하였음을 보여준다. 인물 중심의 주제, 기울어진 주산의 형태, 흑백의 대조가 현저한 산의 묘사, 굴곡이 심한 소나무의 형태, 강한 필묵법 등은 절파 화풍의 영향을 입증한다. 김제는 이처럼 안견파 화풍과 함께 절파계 화풍도 그렸음이 분명하다.
함윤덕의 「기려도(騎驢圖)」는 소경산수인물화의 대표적인 예이다. 절벽과 나뭇가지가 이루는 삼각형 공간에 주제인 나귀를 탄 시인의 모습을 담아 그렸다. 시인과 나귀가 어울려 삼각형을 형성하고 있어 절벽과 나뭇가지가 이루는 보다 큰 삼각형과 조화된다. 나귀를 탄 시인이 중심이 되고 주변의 경치는 무대장치와 같은 역할을 하는데 그치고 있어 소경산수인물화의 전형을 보여줌과 동시에 15세기 강희안의 「고사관수도」와 잘 비교된다. 이 점은 조선 중기의 회화가 초기의 회화의 전통을 계승했음과 더불어 초기에 들어와 있던 절파계 산수인물화가 중기에 크게 유행되었음을 말해 준다. 시인의 옆 얼굴에 드러나 보이는 선비다운 분위기, 당나귀의 비척거리는 동작, 의습에 가해진 변화있는 의습선과 옅은 담홍색 등은 약해 보이는 절벽의 묘사에도 불구하고 함윤덕의 범상하지 않은 화가였음을 보여준다.
김제, 함윤덕과 더불어 주목되는 화가는 화원 이정근이다. 이정근은 안견파 화풍과 미법산수화풍을 함께 그렸다. 그의 「설경산수도(雪景山水圖)」는 안견파 화풍을 계승하여 자기화하였다. ×자 형의 구성, 식빵 덩어리를 연상시키는 특이한 산의 형태, 뒤로 물러가면서 깊어지는 거리감과 오행감, 크고 작은 변화가 심한 필채, 녹두색 위주의 설채법 등이 두드러진 특징으로 드러난다. 이러한 특징들의 상당부분은 그 전의 안견파 화풍과는 다른 차이를 보여준다. 이는 16세기 후반, 조선 중기에 이르러 안견파 화풍이 많은 변화를 겪었음을 보여준다.
그의 또 다른 측면은 그의 「미법산수도(米法山水圖)」에 잘 드러나 있다. 길게 이어지는 대각선 구도, 가까운 곳은 진하게, 멀리 있는 곳은 연하게 그린 필법, 미법, 남종화에 자주 보이는 필법 등은 앞의 작품과는 다른 요소들이다. 이 작품을 통하여 남종화풍이 조선 중기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조선 중기의 화가들 중에서 가장 강력한 화풍을 창출했던 인물은 아무래도 김명국이다. 그는 1636년과 1643년 두 차례 통신사의 화원으로 일본에 가서 크게 환영받았으며 그곳에 적지 않은 작품을 남겼다. 그의 작품 중에서 특히 널리 잘 알려져 있는 것은 「설중귀려도(雪中歸驢圖)」와 「달마도(達磨圖)」이다. 김명국 또한 김시, 이경윤 등과 함께 절파화풍(浙波畵風)을 구사하였으며, 그가 사용한 절파화풍은 거칠고 과장된 기운이 감도는 광태사학파(狂態邪學派)에 가까운 것으로 이 그림은 그러한 경향의 화풍을 잘 보여주는 것으로 강하고 거칠면서도 속도감 있는 선의 움직임과 나무나 산, 바위를 표현하는데 나타나고 있는 날카롭게 각이 져서 꺽여들어간 형태 표현 등이 이 그림을 개성이 강한 작품으로 만들고 있다. 그는 또한 일본에서도 유명하였으며, 그의 인물화는 강하면서도 속도감이 있는 거친 먹선으로 인물의 특징을 간략하고 단순하게 그려 낸 것으로 그의 이러한 방법으로 그려진 대표적인 그림은 달마도(達磨圖,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이다. 일본인들이 즐겨 그리는 달마도의 화풍은 김명국에게서 전하여 졌다고 한다.
「설중귀려도」에서는 화면을 압도하는 대각선 구도, 영산을 연상시키는 날카로운 느낌의 주산, 거칠고 힘에 넘치는 수기법과 필묵법 등이 어울려 힘을 발하고 있다. 김명국은 그것을 극대화시켰다. 그의 호방한 성격이 유감없이 이 작품에 발휘되어 있다. 이와 비슷한 측면은 그의 「달마도」에서도 구현되어 있다. 빠르고 힘차게 순식간에 그려낸 의습과 이목구비, 얼굴에 넘치는 정신세계, 간결하면서도 변화감이 큰 필묵법등이 어우러져 대표적인 달마화상을 창출하였다.
조선 중기의 회화와 관련하여 산수화 못지 않게 주목되는 되는 것은 높은 수준의 인물화의 발달이다.이 시대의 인물화는 「어초문답도(魚樵問答圖)」같은 작품에 의해 대변된다.
인물화를 잘 그렸으며, 힘차면서도 분명한 필력을 지닌 화가이다. 그의 인물 표현은 골격과 근육에 힘이 있고, 옷주름 선이 유달리 강하고 복잡하며 날카롭고, 얼굴 표정이 정세(精細)한 특징이 있다.
왼손에 물고기 꾸러미를 들고 오른쪽 어깨에 낚싯대를 멘 어부와 허리에 도끼를 꿰어찬 초부가 즐거운 대화를 나누며 귀가하는 모습을 갈대숲을 배경으로 하여 묘사한 「어초문답도」는 결국 은둔자로서 선비들의 초탈한 생활의 일면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이러한 주제가 조선 중기에 종종 그려졌다. 특정한 선비들의 초상화를 연상시킬 정도로 기운 생동하는 정확한 얼굴 묘사, 두 사람 사이에 오고 가는 정담, 자연스러운 걸음걸이와 동작, 힘을 넣고 빼면서 가해진 의습선 들이 한결같이 돋보인다.
이와 같이 조선 중기의 회화도 조선 초기 회화의 전통을 잇고 새로운 화풍을 가미하면서 조선 중기 특유의 양식도 발달시켰다. 이 시대는 수묵화의 전성기라고 지칭해도 좋을만큼 묵법에서 대단한 발전을 이루었다. 다양한 주제의 구사, 상이한 화풍의 수용, 변화있는 필묵법 등은 이 시대의 회화에서 쉽게 엿볼 수 있는 현상들로 주목된다. 그러나 정치적 혼란과 보수적 경향 때문이었는데 이미 들어와 있던 남종화풍은 아직 적극적으로 유행되지 못했다.
▶조속(趙涑)의 조작도(朝鵲圖) 조속은 화조화(花鳥畵) 특히 까지 그림으로 유명하다. 그의 그림에서 나무와 새들의 배치상태는 매우 세련된 구성미를 보이고 있으며, 나뭇가지를 형성하고 있는 먹선의 흐름이 속도감과 농담에 자연스런 변화가 있으면서 거침이 없는 노련미가 보인다. 특히 새들의 움직임이 살아있는 듯 생생하게 표현되어 새 그림의 대가라는 평가가 결코 과장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포도(葡萄) 그림을 잘 그린 집중(黃執中 1533 - 1593)의 묵포도도(墨葡萄, 16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계호(李繼祜 1574 - ? )의 포도도(葡萄圖, 간송미술관 소장)와 매화(梅花) 그림으로 유명한 어몽룡(魚夢龍 1566 - ? )의 월매도(月梅圖,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