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화원
동 시대에 태어난 김홍도, 신윤복의 이야기
조선시대 가장 유명한 풍속화가 김홍도와 신윤복!!
김홍도는 '서당'과 '씨름'등의 생동감 넘치는 풍속화 뿐 아니라,
거대한 의궤, 수묵화, 자신의 노년을 사실적으로 그린 자화상 까지...
다양한 그림을 남긴 역사상 가장 유명한 조선의 화가이다.
또한 세련된 필치로 남녀간의 애정을 다룬 그림으로 유명한 신윤복은,
그를 잘 모르는 사람들일지라도
그의 그림이 인쇄된 그림엽서나 달력 한번 보지 못한 사람이 없을 정도로 현대에까지
아니 현대에 와서 더욱 그 가치를 인정 받고 있다.
여기까지가 두 사람에 대해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 두 사람에게는 몇 가지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있다.
첫째, 두 사람은 도화서 화원 생활을 함께 했던 동시대인이며,
둘째, 두 사람이 똑같은 주제를 두고 그린 그림이 여러장 발견되고 있으며,
셋째, 두명의 천재화가 중 김홍도에 대한 자료는 풍부하게 발견되고 있는 반면,
신윤복에 대한 자료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다.
김홍도는 영조, 정조, 순조 세 임금의 총애를 받으며 오랫동안 권세를 누려왔지만
신윤복은 '속된 그림을 그려 도화서에서 쫓겨났다'는 풍문만을 남기고 역사 속에서 영원히 사라져 버렸다.
두 사람이 활동했던 18세기는 우리 역사상 그 어느때보다 안정된 사회를 기반으로 문화가 꽃피었던 시기다.
자신도 뛰어난 화가였던 정조의 적극적인 문예부흥과 개혁 바람을 바탕으로
전근대에서 벗어나 근대로 옮겨가는 긍적적 에너지가 가득하던 그 시기에,
'기록된 자와 기록되지 않은 자' 김홍도와 신윤복이 있다.
도대체 이 두 사람에게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신윤복에 대한 기록은 왜 모조리 사라져 버린 것일까?
그러나, 다행이다.
그의 기록은 사라졌으나 그림만은 온전히 남아있다.
이제, 그의 그림을 찬찬히 들여다보자.
조용히...그림 속에서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이 드라마는 바로 그 이야기이다.
그림 속에 은밀히 숨겨졌던 김홍도와 신윤복의 사랑 이야기........
* 김홍도 본관 김해(金海). 자 사능(士能). 호 단원(檀園)․단구(丹邱)․서호(西湖)․고면거사(高眠居士)․첩취옹(輒醉翁)이다. 강세황의 천거로 도화서 화원이 된 뒤 1771년에 왕세손의 초상을 그렸고, 1781년에 어진화사로 정조를 그렸다.
1788년 스승 김응환이 왕명을 받고 몰래 일본의 지도를 그릴 임무를 띠고 떠날 때 그를 수행, 부산까지 갔으나 김응환이 거기서 병으로 죽자 홀로 쓰시마섬에 가서 일본 지도를 모사해 가지고 돌아왔다.
1790년 수원 용주사 대웅전에 《삼세여래후불탱화》를 그렸고, 1795년 연풍현감이 되었다가 곧 사임하였다. 이듬해 왕명으로 용주사의 《부모은중경》 삽화를 그렸으며, 1797년 정부에서 간행한 《오륜행실도》의 삽화를 그렸다. 산수화․인물화․신선화․불화․풍속화에 모두 능하였고, 특히 산수화와 풍속화에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
산수화는 사실묘사와 조국애가 어울려서 조국 강산의 아름다움을 예술로 승화시킨 것으로 당시의 신윤복․이인문․김석신․김득신 같은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또, 풍속화는 서민사회의 생활정서와 농(農)․상(商)․공(工) 등의 생활정서를 주제로 하여 그들의 생활모습을 익살스럽고 구수한 필치로 그린, 일종의 사회풍자를 곁들인 작품들이다. 기법도 서양에서 들어온 새로운 사조를 받아들여 과감히 시도하였는데, 용주사의 《삼세여래후불탱화》에서 볼 수 있듯이 색채의 농담(濃淡)과 명암으로써 깊고 얕음과 원근감을 나타낸, 이른바 훈염기법이 그것이다.
작품에 《소림명월도》《신선도병풍》《쌍치도》《무이귀도도》《낭구도》《군선도병》《선동취적도》《풍속화첩》《마상청앵도》 등이 있다.
* 신윤복
김홍도와 함께 풍속화의 쌍벽을 이루었다. 본관은 고령. 자는 입부(笠夫), 호는 혜원(蕙園). 아버지는 화원(畵員)이었던 한평(漢枰)이다.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며, 단지 도화서(圖畵署) 화원으로 벼슬이 첨절제사(僉節制使)까지 이르렀다는 사실만 알려졌을 뿐이다. 그의 풍속화는 소재의 선택, 구성, 인물의 표현방법 등에서 김홍도의 풍속화와는 현저히 다른 경향을 보여준다. 김홍도가 소탈하고 익살맞은 서민생활의 단면을 주로 다룬 데 반해, 그는 한량(閑良)과 기녀(妓女)를 중심으로 한 남녀간의 춘의(春意)를 주로 그렸다. 김홍도와의 차이는 인물 묘사에서 더욱 뚜렷이 나타나는데, 대체로 얼굴이 갸름하고 눈꼬리가 치켜올라간 형태로 인물을 그리면서 섬세하고 유연한 선과 아름다운 채색을 적절히 사용했다. 그러나 산수(山水)를 배경으로 풍속화를 전개시키는 경우에는 산수에 보이는 석법(石法)이나 준법(皴法)·수파묘(水波描) 등에서 간혹 김홍도의 영향이 보이기도 한다. 신윤복의 작품에는 남녀간의 애정을 그린 것 이외에도 무속(巫俗)이나 주막의 정경 등 서민사회의 풍모를 보여주는 순수한 풍속화도 적지 않게 포함되어 있으며, 산수화는 담묵(淡墨)과 담채(淡彩)를 주로 사용해 참신한 감각의 분위기를 표현하는 등 조선 말기 이색화풍의 대두에 선구적 역할을 했던 윤제홍(尹濟弘)의 화풍과 유사하다. 신윤복은 대부분의 작품에 짤막한 찬문(贊文)을 쓰고 자신의 관지(款識)와 도인(圖印)을 덧붙이고 있는데, 유교적 도덕관념이 강했던 시기에 속된 그림을 자기의 작품이라고 떳떳이 밝히는 행위가 가능했던 것은 당시 그림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의 화풍은 후대의 화단에 많은 영향을 미쳐 작가 미상의 풍속화나 민화 등에서 그의 화풍을 따른 작품들이 많이 눈에 띈다. 대표작으로는 〈연당야유도 蓮塘野遊圖〉·〈미인도 美人圖〉·〈단오도 端午圖〉·〈무무도 巫舞圖〉·〈산궁수진 山窮水盡〉·〈선유도 船遊圖〉·〈산수도 山水圖〉 등이 있다.